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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하라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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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사하라 유키오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 전선에서 제11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며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그는 북진론을 지지하며 소련을 일본의 위협이자 기회로 인식했다. 1945년 제11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일호 작전과 구이린-류저우 전투에 참가했으며, 종전 후 일본향우연맹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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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하라 유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가사하라 유키오
원어 이름笠原 幸雄
원어 이름 (로마자 표기)Kasahara Yukio
출생일1889년 11월 6일
사망일1988년 1월 2일
출생지센다이시, 미야기현, 일본
군사 정보
복무 기간1913년 – 1945년
최종 계급[[File:帝國陸軍の階級―襟章―中将.svg|35px]] 육군 중장
지휘일본 제국 육군 제12사단
일본 제국 육군 제11군
참전중일 전쟁
기타

2. 생애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22기)와 육군대학교(30기)를 졸업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며 소련 전문가로 활동했고, 북진론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1] 이후 참모본부와 야전 부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근위기병연대 사령관(1934-1936) 등을 거쳐 1937년부터 관동군 참모차장, 1939년부터 북중국방면군 참모장, 1941년에는 제12사단 사단장으로 복무하며 중일 전쟁에 깊이 관여했다.[2]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1942년부터 1945년 4월까지 관동군 총참모장을 역임하며 우메즈 미치로 대장과 야마다 오츠미 대장을 보좌했다.[2][3] 전쟁 말기인 1945년 4월에는 제11군 사령관으로 자원하여 중국 전선에서 일호 작전 등에 참전했다.[2][3]

종전 후에는 부대를 이끌고 귀국했으며, 1947년 공직추방 예비 지정을 받았다.[3] 전후에는 일본향우연맹 이사장 등을 지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미야기현 센다이에서 육군 주계정 3등이었던 아버지 가사하라 고우스케(笠原幸之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도쿄이다. 도쿄부립 제일중학교, 육군중앙소년학교 예과 및 본과를 거쳐 학업을 이어갔다.

학력
연도학교비고
?도쿄부립 제일중학교현 히비야 고등학교
?육군중앙소년학교 예과
?육군중앙소년학교 본과
1913년 5월육군사관학교22기 졸업
1918년 11월육군대학교30기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소련 모스크바무관으로 파견되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중이던 1931년 3월 4일, 가사하라가 도쿄의 육군참모본부에 보낸 전보가 소련 군사정보부에 의해 가로채여 해독되었고, 이는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해당 전보에서 그는 적군의 능력을 낮게 평가하며 적절한 시기를 놓치기 전에 "신속한 전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1]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한 그의 상관과의 대화 내용이 소련 비밀경찰(OGPU)에 의해 해독되어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이 대화에서 그는 소련이 더 강해지기 전에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련 서부 국경에 있는 국가들(폴란드, 루마니아 등)이 우리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당시 주소련 일본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의 생각, 즉 "이 전쟁의 주요 목표는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 극동과 시베리아 동부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1]

일본으로 돌아온 후, 참모본부 제2국 제4과(유럽 및 미국 군사정보 담당)에서 소련 관련 업무를 맡았다.[1]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기병학교 교관을 지냈고, 1934년부터 1936년까지는 근위기병연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6년에는 다시 참모본부 제2국으로 복귀하여 유럽, 미국, 러시아 정보를 모두 담당하는 제4과, 제5과, 제6과의 과장이 되었다. 그는 북진론의 주요 지지자로서, 소련을 일본의 중대한 위협이자 동시에 기회로 여겼다.[1]

2. 2. 소련 주재 무관 및 북진론

가사하라 유키오(笠原 幸雄|가사하라 유키오일본어)는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소련 모스크바무관으로 파견되어 근무하며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소련 군사정보부에 의해 면밀히 감시되고 있었다.

1931년 3월 4일, 가사하라가 도쿄의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이 소련 군사정보부에 의해 도청되어 해독되었고, 그 내용은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해당 전문에서 가사하라는 적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며, 소련이 더 강해지기 전에 "신속한 전쟁"을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침략적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OGPU(소련의 비밀경찰 및 정보기관)가 가사하라와 모스크바를 방문한 그의 상관 사이의 대화를 도청하여 해독했고, 이 역시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이 대화에서 그들은 소련이 군사적으로 더 강력해지기 전에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폴란드루마니아 등 소련 서부 국경의 국가들이 우리(일본)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평가하며 잠재적 동맹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또한, 당시 소련 주재 일본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의 생각, 즉 “이 전쟁의 주요 목표는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 극동과 동부 시베리아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노골적인 영토 확장 야욕도 거론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가사하라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 제2국 제4과(유럽 및 미국 군사정보 담당)에서 소련 전문가로 활동했다.[1] 이후 기병학교 교관(1933-1934)과 근위기병연대장(1934-1936)을 거쳐, 1936년에는 다시 참모본부 제2국으로 복귀하여 유럽, 미국, 러시아 정보를 모두 담당하는 제4과, 제5과, 제6과 과장을 맡았다. 그는 북진론(北進論, 北進論|호쿠신론일본어)의 주요 지지자로서, 소련을 일본의 안보에 큰 위협이자 동시에 침략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간주하는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

2. 3. 정보 장교 및 참모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러시아 모스크바무관으로 파견되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중이던 1931년 3월 4일, 가사하라가 도쿄의 육군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이 소련 군사정보부에 의해 감청 및 해독되어 스탈린에게 보고되었다. 이 전문에서 그는 적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며, 시기를 놓치기 전에 "신속한 전쟁"을 촉구했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소련 국가정치보안부(OGPU)가 가사하라와 모스크바를 방문한 그의 상관 사이의 대화를 해독하여 스탈린에게 전달했는데, 이 대화에서도 그는 소련이 더 강해지기 전에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련 서부 국경에 있는 국가들(최소한 폴란드루마니아)은 우리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당시 주소련 일본 대사였던 히로타 고키의 생각, 즉 "이 전쟁의 주요 목표는 공산주의로부터 일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 극동과 시베리아 동부를 장악하는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참모본부 제2국 제4과(유럽 및 미국 군사정보 담당)의 소련 담당으로 배속되었다.[1] 1933년부터 1934년까지는 기병학교 교관을 지냈고, 이후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근위기병연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36년, 유럽, 미국, 러시아 정보를 모두 담당하는 제4과, 제5과, 제6과 과장으로 참모본부 제2국에 복귀했다. 그는 북진론의 주요 지지자로서, 소련을 일본에 대한 큰 위협이자 동시에 기회로 여겼다. 1937년(쇼와 12년) 참모본부 부속을 거쳐 초대 러시아과장을 지냈다.

1937년부터 1938년까지 관동군 참모차장으로 만주국에 파견되었다. 1938년에는 삼국동맹 체결 후 군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독일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참모본부 총무부장이 되었다.

1939년(쇼와 14년) 9월, 북중국방면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다다 준 중장을 보좌했다. 1941년(쇼와 16년) 3월에는 관동군 제3군 예하 제12사단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1942년(쇼와 17년) 8월부터 1945년(쇼와 20년) 4월까지 관동군 총참모장으로서 우메즈 미치로 대장과 야마다 오츠미 대장을 차례로 보좌했으며, 보급감을 겸임했다.

1945년(쇼와 20년) 4월, 스스로 야전 지휘관을 자원하여 고즈키 요시오 장군의 후임으로 중국 파견군 제6방면군 예하 제11군 사령관에 취임했다.[2] 제11군은 1944년(쇼와 19년) 상계 작전 수행을 위해 창설된 부대로 약 10개 사단, 40만 명 규모였다. 가사하라는 제11군을 지휘하며 일호 작전의 후반부, 특히 귀림-류저우 전투 등에 참가했다. 그는 부임 후 “불태우지 마라, 죽이지 마라, 훔치지 마라”는 이른바 “삼계(三戒)”를 내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부대가 전범 문제 없이 일본 본토로 귀환했다고 전해진다. 종전 후에는 후난에서 지우장으로 이동하여, 국민정부군의 벽악(zh) 대장과 교류하며 1946년(쇼와 21년) 6월 상하이에서 부대가 귀국할 때까지 주로 황무지 개간을 통한 자급자족 생활을 허가받았다.[3]

1947년(쇼와 22년) 11월 28일, GHQ로부터 공직 추방 예비 지정을 받았다.[3]

2. 4.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1937년(쇼와 12년) 참모본부 부속 및 초대 러시아과장을 거쳐 관동군 참모차장으로 만주국에 파견되었다.[1][2] 같은 해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진론의 주요 지지자로서 소비에트 연방을 일본의 주요 위협이자 기회로 간주했다.[1]

1938년에는 삼국 동맹 체결 후 군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을 방문했으며, 일본으로 돌아와 참모본부 총무부장이 되었다.[2] 그러나 곧 중국 전선으로 다시 파견되어, 1939년(쇼와 14년) 9월부터 1941년까지 북지나방면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사령관 다다 준 중장을 보좌했다.[2]

1941년(쇼와 16년) 3월에는 관동군 제3군 예하 제12사단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만주 지역에 주둔했다.[2] 이후 태평양 전쟁 기간 대부분인 1942년(쇼와 17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다시 관동군으로 복귀하여 총참모장으로서 우메즈 미치로 대장과 야마다 오츠미 대장을 보좌했으며, 보급감(補給監)을 겸임했다.[2][3]

1945년(쇼와 20년) 4월, 스스로 야전 지휘관을 자원해 고즈키 요시오 중장의 후임으로 중국 파견군 제6방면군 예하 제11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다.[2][3] 제11군은 1944년(쇼와 19년) 대륙타통작전의 일환인 상계 작전 수행을 위해 신설된 부대로, 10개 사단, 약 40만 명 규모의 대병력이었다.[3] 그는 제11군을 지휘하며 일호 작전 공세, 특히 귀림-류저우 전투에 참가하여 후난성광서성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2][3]

가사하라는 제11군 지휘 시 “불태우지 마라, 죽이지 마라, 훔치지 마라”는 이른바 “삼계(三戒)” 원칙을 내세웠다고 하며, 이로 인해 부대원 중 단 한 명의 전범도 없이 종전 후 본토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3] 종전 후에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후난성에서 장시성 지우장으로 이동했으며, 국민정부군의 벽악(璧岳) 대장과 교류하며 향후 일중 우호를 다짐했다고 전해진다. 1946년(쇼와 21년) 6월 부대가 상하이에서 철수할 때까지 주로 황무지 개간을 통해 자급자족 생활을 영위했다.[3]

2. 5. 종전 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가사하라는 후난에서 지우장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국민정부군의 벽악(璧岳) 대장과 장래의 일중 우호를 다졌으며, 1946년 6월 부대가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주로 황무지를 개간하며 자급자족 생활을 하도록 허락받았다.

1947년 11월 28일 공직추방 예비 지정을 받았다.[3] 전후에는 일본향우연맹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도쿄 도야마(戸山)의 옛 육군 근위기병사단 터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3. 계급

날짜계급
1911년(메이지 44년) 3월 10일정팔위[4]
1914년(다이쇼 3년) 2월 10일종칠위[5]
1919년(다이쇼 8년) 3월 20일정칠위[6]
1924년(다이쇼 13년) 5월 15일종육위[7]
1937년(쇼와 12년) 9월 1일정오위[8]


4. 훈장 등


  • 1918년(다이쇼 7년) 11월 29일 - 은사의 군도[9]
  • 1940년(쇼와 15년) 8월 15일 -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10]

참조

[1]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2] 웹사이트 The Pacific War Online Encyclopedia
[3] 간행물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949-11-28
[4] 간행물 官報 1911-03-11
[5] 간행물 官報 1914-02-12
[6] 간행물 官報 1919-03-21
[7] 간행물 官報 1924-06-04
[8] 간행물 官報 1937-09-10
[9] 간행물 官報 1918-12-03
[10] 간행물 官報 194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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